1108년 척준경의 활약으로 석성을 점령하다.
고려의 소드마스터 척준경. 여진족이 석성에서 농성을 벌이며 버티자 척준경은 갑옷과 방패 하나만을 든 채 성벽을 기어올라 여진족을 참하고 석성의 성문을 열었습니다. - 석성전투
윤관은 여진 대부대의 습격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채 포위됩니다. 척준경은 1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활로를 뚫어윤관을 구합니다. 이후 여진족을 쫓아가 36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 가한목 전투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만명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공격해 옵니다. 이미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가 병력과 군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농성을 결의 하지만 척준경은 전투에 나가길 자청합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합니다. - 영주성 전투
구사일생한 윤관은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합니다. 권지승선 왕자지가 명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여진족에게 기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습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서고, 여진족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칩니다.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척준경은 철갑마를 노획해 선물합니다. - 공험진 전투
여진군 알새는 수만에 달하는 대병을 동원하여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합니다.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라 요청합니다. 척준경은 이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가는데... - 웅주성 전투 1차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한 뒤 이끌고 통재진, 야등포, 길주를 거치며 마주한 여진군을 모조리 격파합니다.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물리치고 웅주성을 구합니다. - 길주 전투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며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 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으로 대응합니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1052년 황성 안 서쪽에 사직단을 신축함 - 고려사
1417년 우산도 주민이 15호 86명으로 보고됨 - 조선왕조실록
1422년 경상도 용궁과 예천에서 지진이 일어남 - 조선왕조실록
1449년 《고려사》를 기전체의 형태로 바꾸어 편찬하게 함 - 조선왕조실록
1460년 전국의 역(驛)을 재정비함 - 조선왕조실록
1470년 예종 창릉을 만듦 - 조선왕조실록
1470년 전라도·경상도에 흙비가 내림 - 조선왕조실록
1496년 신숙주·정창손·홍응을 성종 묘에 배향함 - 조선왕조실록
1532년 중종이 사람의 장단점에 맞게 기용하라고 명함 - 조선왕조실록
1615년 이원익이 폐모 반대를 상소함 - 조선왕조실록
1637년 병자호란에 패한 결과 왕세자 일행이 볼모로 감 - 조선왕조실록
1662년 경상도의 기민이 2만 2,629명, 전염병 환자가 3,642명으로 보고됨 - 조선왕조실록
1669년 훈련별대를 설치함 - 조선왕조실록
1695년 좌의정 박세채 죽음 - 조선왕조실록
1696년 인육을 먹은 굶주린 백성에 대한 사형을 면해 줌 - 조선왕조실록
1713년 중인과 서얼의 증직 규정을 정함 - 조선왕조실록
1721년 은화가 부족하여 은을 산출하는 곳과 군문의 연점(鉛店)을 모두 호조에 귀속시키게 함 - 조선왕조실록
1730년 지진이 일어남 - 조선왕조실록
1734년 사치 금지문을 반포하게 함 - 조선왕조실록
1747년 어영대장 구성임에게 도성을 수호하는 절목을 올리게 함 - 조선왕조실록
1757년 남자 30세, 여자 23세 이상 혼인하지 못한 자에게 쌀과 돈을 지급하게 함 - 조선왕조실록
1778년 호위 삼청을 합쳐 하나의 청으로 함 - 조선왕조실록
1780년 주연(晝烟)을 폐지하고 봉화를 복구하며 각 영·각 읍의 급채를 폐지함 - 조선왕조실록
1808년 평안도에서 관원들의 금광 채굴을 금지함 - 조선왕조실록
1810년 흉년으로 인해 호남·호서의 대동목(大同木) 납부를 연기해줌 - 조선왕조실록
1836년 서북도의 인재를 등용하게 함 - 조선왕조실록
1887년 영국 동양 함대, 거문도 점령 22개월 만에 완전 철수 - 근대사 연표
1899년 일제, 한국에서 유통되던 은전. 지폐. 엽전 중에 엽전만 남기고 모두 빼앗아감 - 근대사 연표
1903년 한성 판윤 장화식, 일본 제일은행권의 유통 금지령 공포(2.13. 해제) - 근대사 연표
1909년 나철·오기호·이기 등, 서울 제동에서 단군 대황조 신위(檀君大皇祖神位) 봉안, 단군교 포명서 공포 - 근대사 연표
1920년 민원식 등 국민협회, 일본 중의원 의장에게 한인의 참정권 청원서 제출 - 근대사 연표
1925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소작인 460여 명, 소작료 문제로 소작 쟁의 일으킴 - 근대사 연표
1930년 간도 동흥중학·대성중학교생 300명, 광주 학생 운동 관련 가두 시위 전개, 광주 학생을 지원하자는 격문 살포 - 근대사 연표
1945년 한중 문화 협회,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 청년 35명에 대한 환영 대회 개최 - 근대사 연표
1946년 독립 동맹 서울 특별 위원회(위원장 백남운) 결성 - 대한민국사 연표
1947년 안재홍, 미 군정청 민정 장관에 임명 - 대한민국사 연표
1949년 국방부, 남북 교역 중지를 국무회의에 요청 - 대한민국사 연표
1949년 프랑스 정부, 대한민국 정식 승인 - 대한민국사 연표
1951년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 38선 정지 절대 반대 입장 천명 - 대한민국사 연표
1959년 검찰, <여적> 필화 사건으로 〈경향신문〉에 압수 수색 영장 - 대한민국사 연표
1961년 최인훈, 『광장』(정향사) 발간 - 대한민국사 연표
1969년 서울 시내 4개 학군 5만여 국민학생, 중학교 무시험 추첨 실시 - 대한민국사 연표
1972년 한강, 66년 만에 얼지 않음 - 대한민국사 연표
1974년 이호철·임헌영·김우종·정을병·장병희 5명, 반공법 및 간첩 혐의로 구속 - 대한민국사 연표
1981년 한국산 흑백 텔레비전, 단일 상품 수출 실적 세계 1위 - 대한민국사 연표
1982년 태권도,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서 88 서울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 - 대한민국사 연표
1993년 북한,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 거부 발표 - 대한민국사 연표
2007년 정몽구 현대 자동차 그룹 회장, 대법원에서 비자금 조성 혐의로 징역 3년 선고 - 대한민국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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